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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영화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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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개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친목 모임을 한다. 2024년 지구를 떠나신 정종화 영화연구가를 대신해 한국영화인원로회 이해룡회장, 영화평론가 정용탁교수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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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정용탁 영화평론가, 노만 영화예술원장, 이해룡 영화인원로회장, 김종원 영화평론가. 

충무로 고꼬로 오뎅에서 점심 식사를 하다가 얼마 전에 '시대를 초월한 영화작가, 이만희 감독님 50주기전 이만희감독님' 회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이만희감독님 작품에 출연하신 이해룡 영화인원로회장님의 영화촬영현장을 추억소환하였다. 영화현장에는 없었지만 시대를 넘어 이만희감독님의 공감능력자로서의 촬영현장이 오롯이 내게 전해져 왔다. 

 

 

 

노만 영화예술원장님과 이만희 감독님과의 과거 <만추>(1966)영화에 대한 과거 인연을 언급하고자 한다.

칠성영화주식회사 노만 대표님과 <만추> 영화사가 노만 발췌.

이만희(李晩熙, 1931~1975) 감독님의 <만추>(1966)는 1966년 11월 초 크랭크인하여 같은 달 말에 촬영을 완료, 다음 달인 12월 11일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했다. 위폐범으로 쫓기는 남자와 모범수로 휴가를 나온 여자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이 영화는 이만희감독님의 대표작이자 한국영화사의 수작으로 각인되어 있다. 

노만 원장님은 1968년 영화사 '칠성영화주식회사(七星映畵株式會社)'룰 설립하고 영화 수출업으로 만난 작품이 <만추>였다. 제작자 호현찬(19262020)으로부터 이 영화의 수출 판권을 구입한 노만 원장님은 검열로 삭제된 장면을 재촬영한 판본의 제작 및 투자자로 관여한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된 이 영화의 검열 서류의 '제한사항'란에는 화면 삭제와 단축 사항 각각 1곳이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S#80, 82 , 화면 단축, 남녀 애무씬 단축, S#83, 화면 삭제, "피스톤" 움직이는 장면 삭제.

호현찬은 2005년 '우리 영화를 위한 대화 모임'과의 인터뷰에서 <만추>의 해외 상영에 대해 "영화연구가 노만 씨의 소개로 미국에 <만추> 두 벌을 팔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노만원장님은 <만추>의 미주 수출과 영화제작업 종사 경험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한다.

"영화 수출업에 뛰어든 것은 미국에 살고 있던 친구 김성직(金成㮨)의 제안으로 인해서였다. 서울고 동기였던 그는 전쟁 직후 미국으로 유학 간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미국 현지에서의 절차를 담당할테니 영화 수출업을 함께 하자고 내게 제안을 해와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금성센터로부터 독립하여 개인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8년 11월 칠성영화주식회사는 서울 중구 을지로3가 291번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문화영화 제작사, 정확히는 '문화영화 제작업 및 동 배급업, 흥행업, 영화기재 판매업' 업종으로 등록 및 설립되었다. 내가 대표를 맡고, 남동생 노만원과 김성직의 형제들인 김용직(金容㮨), 김경직(金暻㮨), 김형직(金衡㮨)을 이사로 두었다. 친분이 있던 영화감독 이경식의 아버지이자 공화당 정책위 의장을 역임한 법조인 이종극(李鍾極, 1907~1988)의 도움으로 공증을 할 수 있었고 설립 절차를 마쳤다.

처음에는 문화영화 제작을 구상했다. 나는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자연이나 야생화, 전통 무속 등과 같은 소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월트 디즈니에서 제작한 <사막을 살아있다>(The Living Desert, 1953, 제임스 알가) 같은 생태 자연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특히 그 영화에서 선인장 꽃이 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무척 신기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되는 것을 보고 언젠가 이런 작품을 한 번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극영화보다도 이러한 한국적인 소재를 담은 문화영화를 제작해 보면 나름 의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현하진 못했다. 

해외 수출작으로 선택한 영화가 <만추>였다. 이 영화 정도라면 해외에 내놓아도 인정받을 수 있는, 상당한 수작이라고 판단했다. 이만희 감독의 이전 작품들인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이나 <흑맥>(1965)도 꽤 인상적이었지만 <만추>는 그를 완전히 새롭게 보게 했다. 

제작자인 호현찬을 찾아가 영화의 수출 판권을 구입했다. 대전 출신으로 1958년 <동아일보> 영화 담당 기자 출신이었던 그는 1964년 <동아일보>를 나와 '한국문화프로모션'이라는 영화제작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영화 기획자이자 제작자로 나섰다. 그와는 1950년대 후반 영화잡지 시절부터 인연이 있던 사이였다.

재촬영한 장면은 영화 후반부 곳간차에서 이루어지는 두 남녀 주인공의 러브신이었다. 국내 상영용이 아닌 해외 수출용이었기에 굳이 검열을 염두해 두지 않았도 됐다. 미국에 있던 김성직 역시 <만추>가 "미국에서도 통하겠다"는 대해 동의했다. 국내 상영용이 아니니 좀 더 과감한 표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검열로 잘려 나간 부분을 재촬영하기로 하고 이만희 감독과 주연배우 신성일을 섭외했다.

1969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단 하루동안 재촬영이 진행되었다. 그 곳이 어디였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만희 감독으로서는 한 번 촬영하여 마무리를 한 작품에 다시 손대는 것이 번거로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재촬영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신성일 배우도 그 바쁜 와중에 고맙게도 시간을 내주어 촬영에 열심히 임해주었다. 이만희 감독과 신성일 배우 모두 나와은 그 날 현장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상대 여배우였던 문정숙의 경우 제작부장이 어디선가 섭외해 온 대역 배우로 대체되었다. 이만희 감독은 신성일과 대역 여배우에게 세세한 지도를 직접 해보였다. 실제 촬영장에서는 몇 사람의 스태프를 제외한 인원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기억도 난다. 

이날 촬영감독은 장석준(張錫俊, 1935~1980)이 맡았다. 장석준과는 서울고 동기 동창으로 서로 안면이 있었다. 본편을 맡았던 서정민(徐廷珉, 1934~2015) 촬영감독을 대신해 섭외한 그에게 제작비용을 주고 이날 재촬영을 전적으로 일임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가 촬영 당일 현장에서 보인 모습에 내가 화를 내고 말았다. 자투리 필름을 가지고 우왕좌왕하다가 필름이 모자라서 원래 찍기로 한 분량을 다 찍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이게 말이 되느냐"며 펄펄 뛰었다. 평소 그를 착실한 이로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 책임감 없는 모습을 보였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재촬영분이었지만 세트와 미술 등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추어 놓고 진행을 했다. 이만희 감독과 신성일 배우도 이런 상황에서 화를 냈을 법한데, 정작 화가 난 것은 돈을 댄 나였다. 어쩔 수 없었다. 여하간 그날 재촬영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수출용 프린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네가 필름에서 포지티브 필름으로 현상하는 과정부터, 대사 및 영문 자막 번역, 해설 녹음 등을 거치는 것만으로도 1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양대 양동군 교수가 대사 번역과 영문 자막, 영화 시작 전 작품에 대한 영어 해설을 직접 녹음해 주었다. 미국 현지 상영관을 확보하는 데도 몇개월이 소요되었다. 미국 LA에서 한국 영화를 상영했다는 확인증을 현지 한국 영사관으로부터 받아야 공보부에서 실적을 인정했기에 절차가 매우 복잡했다. 한국에 있는 나는 친구 김성직이 미국에서 어떻게 일을 진행하고 있는 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었으니, 확실히 현지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는지도, 프린트의 행방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기대한 것은 외화 수입 쿼터였다. 당시 영화 정책은 국산 영화를 육성하기 위해 외화 수입을 제한했다. 이를테면 1년에 수십 편, 이렇게 정해놓으면 그 이상 외화가 들어오지 못하니 쿼터 값이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쿼터 하나에 약 1억원에 가까운 값을 주었으니 영호하사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를 통해 미국에 있는 김성직이 현지에서 영화를 수입하고 이곳에서 영화를 수출할 실적이 있으면 쿼터를 받을 수 있어 그것을 노렸다.

하지만 1970년 8월 제3차 영화법 개정으로 외화 수입업자의 기준이 강화되는 바람에 외화 수입 쿼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만추>에 이어 수출을 계획하던 <갯마을>(1965, 김수용)의 판권 구입 계획도 흐지부지되었다. 호현찬이 다른 사람에게 <만추>의 스페인 수출 판권을 팔았다는 것은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다.

결국 1972년 1월 초 칠성영화주식회사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폐업했다. 1971년 12월 문화공보부가 시행한 영화제작 실태 조사에서 칠성영화주식회사는 법정 등록 요건과 제작 실적 미달 정비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국산영화의 건전한 육성, 발전"을 내걸고 총74개 영화사 중 40개 영화사의 제작 활동을 허가했고 나머지 34개 영화사를 정비했다. 비싼 비용을 들여 마련한 카메라와 조명 기구 등 각종 장비들을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하고 처분했다. 칠성영화주식회사를 마지막으로 영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호현찬과는 2019년 무렵 한 지인을 통해 연결되어 한 차례 통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서로 전화로 잠시 근황을 나눈 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호현찬은 이듬해인 2020년 3월 17일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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