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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영화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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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3일 목요일 매달 열리는 진고개모임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 어김없이 충무로 초원다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1965년 <갯마을> 고인이 되신 김수용감독님의 작품에 참여하신 전조명촬영감독, 김수형조감독과 우연히 조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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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한국영화예술원 노만 원장님, 김종원 영화평론가, 전조명 촬영감독님, 김수형감독님(<갯마을> 조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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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전조명촬영감독님, 한국영화예술원 노만 원장님, 김종원 영화평론가, 김수형 감독님.

 

노만 원장님은 <영화예술> 1966년 2월호에 수록된 '1965년 <영화예술> 베스트텐 순위 및 심사 후감>에서 그해 개봉된 한국영화 10편, 외국영화 10편을 선정하여 김수용감독님의 <갯마을>(1965)과 이만희 감독님의 <흑맥>(1965)을 특별히 언급했다. 

"양산의 우리 영화계에서 베스트 텐을 꼽아 내자니 너무 빈약함을 절감 않을 수 없다. 남우(男優), 여우(女優)는 더구나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평균 연령 40가 아직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영화계를 위해 요원감을 줄 뿐 실력있는 신인의 등장을 기대할 수 밖에 - 특히 작품 선정에서 <갯마을>을 앞세운 것은 그 주제의식이 뚜렷했고 김수용 타작(他作)에 비한다면 월등한 것이었다. 쫓기는 듯한 템포에 사로잡혀 있던 연출이 이 작품에서는 그래도 심리적 갈등을 중시한 데서 감독상의 후보로 내세웠다. 사실 갯마을을 떠난 생활 등 여러가지로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 한편 <흑맥>은 영화적으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 연출의 우수점도 없지 않았으나 아까운대로......" - 노만 제 2회 영화예술상 심사위원 베스트텐 선정 및 심사 후감.

1969년 노만 원장님의 <갯마을> 1965년 김수용감독님 작품의 기억에 대한 단상, 소고.

1969년 노만 원장님이 기대한 것은 외화 수입 쿼터였다. 당시 영화 정책은 국산 영화를 육성하기 위해 외화 수입을 제한했다. 이를테면 1년에 수십 편, 이렇게 정해놓으면 그 이상 외화가 들어오지 못하니 쿼터 값이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쿼터 하나에 약 1억원에 가까운 값을 주었으니 영화사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를 통해 미국에 있는 서울고 6기 동창인 김성직이 현지에서 영화를 수입하고 이곳에서 영화룰 수출한 실적이 있으면 쿼터를 받을 수 있어 그것을 노렸다. 

하지만 1970년 8월 제3차 영화법 개정으로 외화 수입업자의 기준이 강화되는 바람에 외화 수입 쿼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만추>(1966, 이만희)에 이어 수출을 계획하던 <갯마을>(1965, 김수용)의 판권 구입도 흐지부지되었다. 호현찬이 다른 사람에게 <만추>의 스페인 수출 판권을 팔았다는 것은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다. 

결국 1972년 1월 초 칠성영화주식회사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폐업했다. 1971년 12월 문화공보부가 시행한 영화제작 실태 조사에서 칠성영화주식회사는 법정 등록 요건과 제작 실적 미달 정비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국산영화의 건전한 육성, 발전"을 내걸고 총 74개 영화사 중 40개 영화사의 제작 활동을 허가했고 나머지 34개 영화사를 정비했다. <34개 영화사 정비>, 매일경제 1972.1.6. 7면. 

비싼 비용을 들여 마련한 카메라와 조명 기수 등 각종 장비들을 한번도 사용해보지 못하고 처분했다. 칠성영화주식회사를 마지막으로 영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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