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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이름은 지연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일요일에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날도 마침 일요일이었다”라는 도입부의 보이스 오버에 따르면 <휴일>의 내러티브는 허욱의 과거, 정확히 말하면 지연이 죽은 특정한 일요일 하루에 대한 기억의 스토리이다.  

흙바닥을 굴러다니며 간혹 카메라 앞으로 날아드는 휴지조각, 낙태를 이야기하는 두 사람 사이에 보이는 십자가 형태의 전봇대 등등. 「서울, 1964년 겨울」이 언급한 ‘사물들이 벌거벗은 순간’을 영화적으로 재현한 듯한 이런 숏들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뒷전으로 밀어내며, 1968년 늦가을의 서울(이 영화가 촬영된 시기)의 허무와 우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전달한다. 

내러티브 차원에서 <휴일>은 일요일 아침부터 자정 무렵까지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내러티브의 시간은 대사로 밝혀지는데, 도입부에서 택시를 잡은 허욱이 시간을 묻자 운전수가 “10시 17분전입니다”라고 답하고 결말에서는 “다음은 원효로 종점입니다. 금일 전차 운행은 이것으로 끝입니다”라는 차장의 안내로 1968년 11월30일 전차가 마지막으로 운행된 대한민국의 역사적 순간을 영화에 삽입하고 끊어진 철길을 보여주며 허욱의 자살시간(1968년 12월1일)을 짐작하게 한다. 

영화 곳곳에서 내러티브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은 죽은 시간을 감독은 부러 서사의 연속성을 파괴하고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아마도 이 영화가 미완성이 되었지만 감독은 더 이상 배회할 수 없는 허욱의 참담한 현실을 전차의 마지막 운행으로 허욱의 자살을 관객에게 인식시키고자 했을 것 같다. <휴일> 작품은 의도적으로 ‘시간 착오 - 죽은 시간’을 반복적으로 관객에게 주입시킨다. 

허욱이 수술비를 빌리기 위해 찾아간 첫 번째 친구의 집은 내러티브의 시간대는 1968년 현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관객의 허를 찌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깥에서 불투명 유리문을 두들기는 허욱의 그림자와 벽에 걸린 달력을 잡은 숏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와 달력을 잡은 숏으로 연결되어 관객의 시선을 다시 한 번 달력으로 이끈다.

그 달력의 시간 지표는 단기 4293년 경자년 즉 1960년 2월이므로 자연스레 지연의 이야기는 4․19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 된다. 그렇다면 “그 여자의 이름은 지연이었다.”라는 도입부의 보이스 오버는 1960년 2월에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는 1968년 현재의 진술로 이만희감독은 관객에게 분명하게 알려주며 영화가 시작된다. 그런데 그런 해석은 다른 신 달력의 시간은 1960년 2월에서 관객은 또 무너진다. 

지연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허욱은 골목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살펴보는데, <칼 막스의 제자들>, <유성의 검>, <그대 이름은>, <남>, <정부 마농> 등은 모두 1968년에 개봉된 영화이다. 

이렇게 현재와 과거 내러티브의 시간과 죽은 시간이 거듭 교차되면서 이 영화는 혁명 이후가 혁명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만희 감독은 관객들에게 반복적으로 주지시키고 있다. 

허욱이 찾아간 두 번째 친구 억만은 중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도 나왔지만 “이 사회에선 낙제를 한” 실업자이다. ‘말세’라는 술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낙서로 가득 찬 벽을 향한 채 대화를 나누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사이에는 “종달새처럼 즐겁게 냇물처럼 꾸준히 태양처럼 뜨겁게”라는 청년의 활기를 표현한 글귀가 씌어있다. 억만은 무의식적으로 그 위를 더듬고, 주먹으로 치고, 손가락으로 짓누르며 언제나 내일을 기다리며 허송세월하는 자신의 절망을 관객들에게 토로한다. <오발탄> 1961년작 유현목감독의 또 다른 오발탄과 같은 인간을 이만희감독은 억만의 캐릭터로 1960년대의 지식인의 허무에 빠진 무력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영화의 시공간은 세 번째 친구 규제의 아파트이다. 하녀, 목욕탕, 냉장고, TV, 얼음을 채운 콜라 등 중산층의 기표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규제는 심심해서 여섯 번째 목욕을 하고 있는 참이다. 그는 허욱에게 외출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나에게 일요일은 고역이야. 너 같은 룸펜을 만나면 커피 값이나 축내고 말이야.” 이 대사에 의해 허욱이라는 캐릭터가 일제 시기 룸펜 지식인의 계보를 잇는 청년 실업자라는 점이 밝혀진다. 

허욱이 만난 세 친구는 각각 섹스, 술, 폭력에 기대 ‘시간을 죽이는’ 청년들이다. 
휴식조차 재생산을 위한 소비로 간주하는 자본주의의 시간을 이미 내재화한 그들은 스스로의 무위를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허욱의 순진함을 비웃지만 행동하기보다는 한 장소에 머물며 그저 고역스러운 휴일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과 허욱의 차이점은 걷기이다. 

커피 값조차 없어 머물 장소를 얻지 못한 허욱은 걷고 또 걸으며 점쟁이, 청소부, 넝마주이, 구두닦이와 같은, 휴식없는 휴일을 보내는 노동자들과 조우한다. 가난 때문에 사회적 규범조차 잊어버린 룸펜이 훔친 담배를 길 위의 노동자들과 나눠필 때, 허무에 빠진 우울한 산책자는 근대화를 내세운 조국에 대한 최소한의 소극적 저항으로 몸부림친다. 

조국 근대화를 위한 생산과 동원의 낮을 지나 밤이 되면 실존의 비상구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서울. 1964년. 겨울」의 청년들처럼 허욱은 영화 내내 그 자신의 ‘비루한 전진’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마치 걷기만이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저항인 것처럼. 낮의 시간이 밤의 시간에 분명히 표현되며 서사의 연속성이 무너진 이후, 허욱의 밤 산책은 시작된다. 

그가 살롱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함께 걸으며 술집을 순례할 때, 이미 금기는 시작된 것이다. 목소리가 제거된 그들의 과장된 연기, 기괴한 음악과 기하학적으로 왜곡된 미장센, 명암이 강조된 조명 때문에 이 시퀀스 전체가 술에 취한 허욱의 착란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지연이 수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고 밤의 내러티브에 그녀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허욱이 다시 지연을 기억해낼 때까지 이어지는 이 이상한 시간을 해명하기 위해 몇몇 시도가 있었으나 낯선 여자는 허욱을 유혹하는 여귀일 수도, 술에 취한 허욱의 망상일 수도 있다. 

허욱이 직면하고 있는 명백한 한 가지는 그가 망각을 통해 이미 죽어있을 지연과 마주해야 할 파국의 시간을 회피하고 유예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종소리로 집단이라는 명분하에 규범짓고 있는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소재를 은유한 감독은 주인공 허욱이 지연을 속히 기억해내고 병원으로 달려간 그가 지연의 마지막 얼굴을 확인하는 대신 병원을 뛰쳐나오는 위선의 허욱을 상황을 관객들에게 알려준다. 

마치 아내의 시체를 어쩌지 못한 「서울. 1964. 겨울」의 서적 외판원 사내처럼. 딸의 죽음을 믿지 않는 지연의 아버지에게 했던 위악적 고백(“정말이에요. 죽었어요. 내가 죽였단 말이에요”)과 규제와의 주먹질은 죄책감에 맞닿아 있는 허욱을 죽음에의 충동에 대해 관객들에게 미리 충분하게 설명한다. 

허욱은 거리를 질주한다. 
그의 정신적 혼미를 보여주는 시점 숏-트래킹 숏과 교차편집으로 그 사이에 틈입하는 지연에 대한 기억은 화재 앞에서 착란을 일으킨 「서울. 1964. 겨울」의 서적 외판원, ‘오발탄 같은 사내’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전차 종점에서 내린 허욱의 보이스 오버(“서울, 남산, 전차, 술집 주인아저씨 하숙집 아주머니 일요일 그리고 모든 것 난 다 사랑하고 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어”)는 그가 서적 외판원 사내와 같은 운명을 선택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아마도 영화상영 허가를 검열관에게 통과시키기 위한 타협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초현실적인 허욱의 자살로 인한 죽음 직전의 숏들이 무너지며 “이제 곧 날이 밝겠지. 새벽이 오겠지. 거리로 나갈까? 사람들을 만날까? 커피를 마실까? 아니 이발관을 가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라는 허욱의 목소리는 <휴일>의 마지막 장면은 파국이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으로 해석하게끔 한다. 

끝이라는 자막에도 불구하고 허욱의 낡은 구두는 마침표라기보다는 쉼표로 읽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통금을 완전히 망각했기 때문이다. 

전차가 완전히 멈춰 역사속으로 사라진 통금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앞의 보이스 오버에는 영화가 끝나고 새벽이 오더라도 그의 걷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구두 숏은 이제 내러티브 바깥에서 일어날 새로운 사건의 조건이 되는 잠재된 태생적 이미지가 되어 통금을 잊은 허욱이 밤 산책을 계속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상상을 하는 관객이라면 허욱의 망각에서 착취하지 않고 인도하는 통치성을 회피할 어떤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지나가는 현재를 붙잡아 두지도, 방향성을 제시하지도 않지만 미지의 가능성을 품은 미래 시제는 길 위에 멈춰선 안의 이미지로 끝난 「서울. 1964년. 겨울」의 결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컬트 영화의 제왕, 데이비드 린치 별세 | 보그 코리아 (Vogue Korea)

멀홀랜드 드라이브 _ 2001년 데이비드 린치 감독 작품.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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