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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영화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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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복지 증진권익 보호에 앞장섭니다.
한국영화예술원은 대한민국 영화 문화의 발전
다양한 프로그램, 차세대 인재 육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국제영화제 개최 및 후원 시스템을 통해
한국 영화의 우수성
세계에 알리는데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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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FILM ART CONSERVATORY
#어쩔수가없다 #시사회 #제로섬사회 #제조전문가공멸 #아날로그시대와의이별 #나와바리 #그래도기록한다쭈욱 #얼지마죽지마부활할거야 #데드돈다이 과거 어떤 젊은 촬영감독이 무슨 자리에서, 필름시대부터 촬영을 했던 사람들이 어서 죽어 자리를 내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더 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다행히 나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 나중에 원로 촬영감독님에게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말 수 적은 원로 촬영감독님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씁쓸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어이가 없다. 그 젊은 촬영감독 같은 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남에 대해서만 왈가왈부를 한다. 걸핏하면, “저렇게 좋은 환경에 시간과 돈만 있으면 나도 그 정도 영화는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과 돈을 버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전진할 힘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자가, 남이 죽어 그 자리가 빈다 한들 거기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위에 언급한 원로촬영감독님은 2015년에 지구를 떠나셨다. #돌아오지않는해병 #만추 #삼포가는길 #이만희감독작품 #촬영감독 #만시간의법칙 #장인정신 #거장 #필름시대 #골동품 #디지털시대 #나르시시스트천조국시대 #콘트라파소 원작소설인 '액스'의 줄거리는 주인공인 '버크'가 정리해고를 당한 후, 재취업을 위해 자신보다 능력 있는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그렸다. #흥행적신호 #CJ영화명가의몰락 https://www.news1.kr/entertain/movie/5887042
2025.09.23.
먼저 이우석회장이 자신의 영화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낸다니 영화를 66년간 함께 한 친구로서 축하를 드린다. 우리의 영화 인생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파란만장’ 파노라마 인생이었다. 1950년 중반의 우리 영화계는 6.25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던 폐허 속에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몇 분의 선배가 영국군이 버리고 간 ‘오스틴 트럭’에 지친 몸을 싣고 다니던 때였다. 이때 이우석도 영화계에 입문했고 나도 비슷한 시절에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우석은 한국 영화를 외국에 수출하겠다는 의지에서 ‘동아수출공사’를 설립했고 나는 ‘우진필름’을 만들었다. 두 사람의 욕망은 영화를 만들자는 뜻은 같았지만 동아수출공사가 한국영화의 외국 수출을 목표로 했다면 우진필름은 한국 영화의 세계화를 목표로 설립되어 이우석은 한국 영화를 동남아에 수출하는 것은 물론 이소룡, 성룡 등의 세계적인 스타를 한국에 정착시키며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영화도 미국영화처럼!’이라는 소박한 꿈을 이루고자 특수촬영의 기술개발과 동시녹음의 정착에 66년의 영화 인생을 다 바친 나와 이우석은 같은 시대에 영화를 시작한 친구지만 한 사람은 영화의 시장개척으로, 또 한 사람은 영화의 기술발전으로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꿈꿔 온 친구들이었다. 그 시절은 열악한 시절이었다. 1956년, 6.25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대구로 피난을 갔던 영화인들도 속속 서울에 모여 들어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그들이 모이는 곳은 ‘연극’의 본거지인 시공관이 버티고 있는 명동이었다. 거기에 나도, 이우석도 끼었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학도의 입장이었고 이우석은 영화에서 돈을 벌겠다고 이 황무지에 들어 온 청년이었다. 나는 그때 나이가 갓 스물 전후였고 이우석은 22세였을 것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몇 년이 흘러 나는 영화감독으로 꽤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이고 이우석은 한국영화 상영이 끝난 필름을 모아 수출하는 직업이었다. 그 시절 한국 영화를 만들겠다는 정열은 있었지만 그 만들어진 필름을 어떻게 소화시키는가를 모르면서 영화인들은 열정적으로 영화 제작에 미쳐 있었던 시절, 이우석 청년은 아무도 관심이 없던 영화필름, 그것도 농립모자 테두리로 쪼개서 사용하는 영화필름을 모아서 동남아에 수출했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우리 영화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노다지’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외국 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 즉 ‘외화수입쿼터’라는 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알지도 듣지도 못하던 이권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국 영화 10편을 수출하고 그 증명서를 문교부에 제출하면 외국영화 수입권이 하나 나왔다. 박정희의 혁명으로 새로운 영화법이 육사8기생들에게 의해 만들어지고 과거의 제도가 없어지고 영화의 이권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소위 영화법 제정에 의해 외국영화를 수입하던 이우석은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대열에 합류한다. 나는 1968년 ‘우진필름’을 설립하여 13명의 소위 메이저영화사 대표가 되면서 영화감독 정진우가 아닌 ‘우진필름’ 대표 정진우로 ‘동아수출공사’ 이우석 대표를 만나게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상옥, 곽정환, 강대진, 주동진 등 쟁쟁한 제작자들과 경쟁하면서 이우석 대표는 비교적 나와는 같은 세대를 나누면서 가장 친근한 친구이면서 가장 치열한 경쟁자로서 영화를 만들고 극장을 경영하고 영화를 수입하고 배급하는 영화의 모든 분야에서 열정적으로 살아왔고, 이제 한국 영화계를 통틀어 두 사람만이 살아남은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영화계 입문이 1956년! 반세기를 넘어 66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한국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내가 만든 영화보다 이우석은 더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고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다. #깊고푸른밤 #적도의꽃 #장사의꿈 등 이우석은 영화에 대해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가 최인호를 영입하여 그의 소설 대부분을 영화화하는 데 성공한다. 최인호는 영화를 짜놓고 소설을 쓰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영화를 만드는데 전혀 무리함이 없다. 이장호감독과 배창호감독의 발탁도 동아수출공사를 성공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이우석은 영화를 공부하지도 못했고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중퇴한 학력밖에는… 그러나 그의 판단력, 결단력, 소위 어려운 문제 앞에서 한판 승부, 세기의 도박사가 됐어야 할 기개. 존경한다! 건강하게 나머지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잘 살아다오! 내가 얼마나 당신의 과거를 알겠는가?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2025.09.03.